어느 영상에서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를 보고나서 어떻게든 기록을 남기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군 제대 후부터 꽤나 많은 영화를 보긴 했는데 제목은 기억이 나도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사실 여러번 영화 감상문을 쓰려고 했으나 한 두편 쓰다가 말았다. 감상평까지는 아니지만 부담없이 몇 자라도 적어보려고 한다.
1. 2013.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래에다 히로카즈, 1.10, 필름포럼
고래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모든 인물들은 사랑스럽다. 영화 중반, 료타가 급작스럽게 케이타와 류세이 모두를 키우겠다고 말하는 장면을 보라. 화가 난 유다이는 손을 치켜 든다. 다른 영화였다면 뺨을 한 대 치지 않았을까. 하지만 유다이는 어색하게 어깨에 힘을 주어 팔을 들어서는, 살짝 머뭇거린 후 료타의 뒤통수를 툭 친다. 신기하게도 뒤통수에 손을 대는 순간 감정은 죽어버린다. 료타와 유다이는 싸우지 않고 고개를 숙여 버린다. 함부로 말을 내뱉은 료타도 그렇다고 얼떨결에 손을 올려버린 유다이도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도 마찬가지지만 살다보면 사람이 미워지는 경우가 있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안 좋은 감정을 갖게 되었는데, 아주 쉽게 분노의 대상은 '상황'이 아니라 '사람'으로 틀어진다. 그럴수록 남는 건 분노일 뿐인데도, 그렇게 분노의 대상을 만들고 나서야 상황이 명쾌하게 정리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분노의 대상이 만들어지면 그 다음부터 분노의 반복, 감정이 소모될 때까지 싸움은 지속된다.
영화에서는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착하다.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이다. 상황이 틀어졌으면 누군가 화를 낼 대상을 찾는 게 일방적인 방식인데, 그렇게 하기 보다는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한다. 변화의 대상으로 그려지는 료타조차도 유다이의 가족을 비난하기 보다는(물론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은 있지만) 자신의 교육방식에 대해 더 고민하는 모습이다.
아이들처럼 어른들도 성장한다. 그렇게 또 한 고비를 넘기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간다.
2.2013.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라이언 쿠글러, 1.24. 필름포럼
인생은 불확실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불확실성은 사회에 배태(social embeddness)되어 있다. 오스카의 하루를 담담하게 그려냄으로써, 미국 사회에 사는 수많은 오스카들이 맞닥뜨릴 '불확실한 인생'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3. 2013. 말하는 건축 : 씨티홀, 정재은, 1.25
공간을 둘러싼 하모니, 불협화음일지라도 그 고민들에 감사한다.
4. 2011. 오싹한 연애, 황인호. 1.26
<연애의 온도>의 이민기는 연애에 있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가 점차 관계를 이해하는 사람으로 변한다. 하지만 <오싹한 연애>의 이민기는 시종일관 손예진에게 동정적이다. 그 이후에 계속 '오싹한', '연애' 비스무리한 게 진행되지만 에피소드의 반복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민기가 마술사로 나오는데 '화려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사랑의 '진실성'을 깨달아 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
까 생각이 들지만, 딱히 왜 마술사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재미는 있지만..
5. 2013.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 1.28
<우리 선희>, <북촌방향>, <해변의 여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본 다섯번째 홍상수 감독 작품이다. 어떤 상징이라든지 영화적 장치 같은 것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몇몇 블로그를 참조해봐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그냥 극의 흐름이 모호한 이 영화의 장면 장면이 좋다. 피식 피식 웃기기도 하고.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중간에 기주봉님이 몇 번 나오고, 류덕환이 담배를 피다가 버리고, 책을 팔고 이런 장면이 일상과 영화 중간에 있을 법한 상황일 뿐 어떤 의미를 띠는지 잘 모르겠다.
이선균과 장은채 두 주인공에 주목해서 보자면,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선균은 해원에게 상당히 불확실한 존재이다. 그는 가정이 있다. 연애의 대상이 유부남이라니 이토록 불확실한 관계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이선균은 교수인데도 은채가 힘들 때 같이 흔들리고 먼저 불안해하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른다.
이걸 사랑이라고 해야 할 지. 아무튼 은채는 이선균을 보고 싶어 계속 만나지만 불확실한 관계 속에서 그녀는 잠이 들어야만 한다. 그들의 불확실한 관계를 둘러싼 여러가지 압력에(은채를 둘러싼 이야기, 이선균의 불안함, 가족의 부재, 어머니가 캐나다로 떠난 역사) 속에서 그 관계를 지켜나가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의 삶처럼, 잠 들기보다는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처럼 '순수한' 관계는 찾아오지 않는다. 항상 피곤함과 불안함과 갈등이 함께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이런 관계를 찾을 것이다. 예지원-유준상이 나타나듯, 우리 앞에 놓인 관계는 '관계 그 자체'일 수 없고 항상 다른 관계 속에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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